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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직 한국사/2020

2020년 국가직 9급 공무원 한국사('가'책형)_11~15번 풀이

by 데일리히스토리 2023.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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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밑줄 친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원종과 애노를 통해 밑줄 친 왕이 통일 신라의 진성 여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하대의 사회 혼란으로 많은 농민들이 몰락하였고, 이에 진성 여왕 때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① 발해가 멸망하였다.

→ 경애왕(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는데, 이때 신라의 왕은 경애왕이었습니다)

② 국학을 설치하였다.

→ 신문왕(국학은 신문왕 때 설치된 국립 대학으로,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③ 최치원이 시무책 10여 조를 건의하였다.

→ 진성 여왕(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이후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은 개혁을 위해 진성 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④ 장보고의 건의에 따라 청해진이 설치되었다.

→ 흥덕왕(흥덕왕 때 장보고의 건의에 따라 해군 기지이자 무역 기지인 청해진이 설치되었습니다)

정답은 ③입니다.

 

12.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옳은 것만을 모두 고르면?

독도에 대한 시대 통합 문제입니다.

ㄱ. 일본의 은주시청합기(1667년)

→ 조선 현종 때 일본에서 간행한 독도에 관한 일본 최초의 문헌으로, 일본의 북쪽 국경을 은주(오키섬)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은주가 울릉도와 독도를 가리킨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ㄴ. 일본의 삼국접양지도(1785년)

→ 일본의 하야시 시헤이가 그린 삼국접양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나타내는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ㄷ. 일본의 태정관 지령문(1877년)

→ 일본 메이지 시대 최고 행정 기관이었던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다는 사실을 공식 문서로 밝혔습니다. 

ㄹ.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1905년)

→ 러·일 전쟁 중 일본은 독도를 주인 없는 섬으로 규정하고 시마네현 고시를 내려 독도를 자국 영토로 불법 편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마네현 고시는 당시 관보 및 일간지에 게재되지 않아 대내외적으로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알 수 있는 자료는 ㄱ, ㄴ, ㄷ으로, 정답은 ①입니다.

 

13.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실었고,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 처분을 받았다는 것을 통해 (가)가 동아일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의 문화 통치 방침에 따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일간지와 일부 잡지의 발행이 허용되었습니다. 이때 동아일보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 운동을 도모하자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실어 비판을 받았습니다. 한편 1930년대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기사를 실어 탄압을 받았습니다. 

① 한글 보급 운동에 앞장서 『한글원본』을 만들었다.

→ 조선일보(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한 조선 일보는 귀향 학생들을 동원하여 『한글원본』 등의 교재를 배포하였습니다)

②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 동아일보(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은 동아일보가 주도하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습니다)

③ 『개벽』,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 천도교(천도교는 기관지인 만세보를 비롯하여 『개벽』, 『신여성』,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습니다)

④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조선일보(조선일보는 제4대 사장으로 이상재가 취임한 후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이후 신간회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답은 ②입니다. 

 

14. (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김춘추, 두 차례 백제와 크게 싸움, 품석 부부의 유골을 가지고 옴을 통해 (가) 인물이 김유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삼국 통일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백제의 대야성 공격으로 대야성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이 죽었는데, 이후 김유신이 포로로 잡은 백제 장수 8명과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교환하여 수습했습니다. 

①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물리쳤다.

→ 김유신(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을 물리쳤습니다)

② 화랑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를 제시하였다.

→ 원광(신라 진평왕 때 원광이 유교·불교 등의 교리에 바탕은 둔 화랑도의 규범인 세속오계를 제시하였습니다)

③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신라왕으로 즉위하였다.

→ 김춘추(신라 진덕 여왕의 뒤를 이어 김춘추가 진골 출신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④ 당에서 숙위 활동을 하다가 부대총관이 되어 신라로 돌아왔다.

→ 김인문(김춘추의 아들이었던 김인문은 당에서 숙위 활동을 하다가 부대총관이 되어 신라에 돌아왔습니다. 특히 대당 외교를 전담하였습니다)

정답은 ①입니다. 

 

15. (가), (나) 신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벼슬길이 막혔다는 것을 통해 조선 시대의 서얼과 기술직 중인에 대해 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 (가)는 조정의 성덕을 입어 문관, 무관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통해 서얼이고, (나)는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것을 통해 기술직 중인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서얼과 기술직 중인의 경우 고위직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 서얼과 기술직 중인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① (가)의 신분 상승 운동은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에 자극받은 기술직 중인들은 축적된 재산과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습니다. 

② (가)는 수차례에 걸친 집단 상소를 통해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 서얼들은 영·정조 때 어느 정도 등용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차례 집단 상소를 하며 관직 진출의 제한 철폐를 요구하였습니다. 

③ (나)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다.

→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은 서얼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습니다. 

④ (나)는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 기술직 중인들은 재산과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고, 철종 때 대규모 소청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정답은 ③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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